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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by 성공보다는 성장 2024. 3. 20.

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요즘 가슴이 답답하다. 새롭게 시작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지만 내세울 만한 성과가 나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주위 사람 눈치를 보게 된다.

 

내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계속 의심한다. 의심이 커질수록 의욕은 떨어진다. 처음 시작할 때는 반드시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건만, 시간이 흐를수록 믿음은 약해져 간다.

 

 

일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답은 자명하다. 나태한 나 자신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당장 성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묵묵히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초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잡스러운 생각들이 몰입을 방해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 열정에 불을 붙여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차분히 내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하자.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를 제대로 아는 것, 나에게 부족한 것, 내 장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메타인지라고 한다. 사람은 메타인지를 통해 더 성장할 수 있다. 성장이 멈춘 나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계속 질문해 본다.

 

나는 1982년 태어났다. 4.5kg이라는 육중한 몸무게를 가지고 태어났다. 우량아를 자연 분만으로 낳는 건 힘들었다. 결국 어머니는 제왕절개를 통해 나를 세상에 꺼냈다. 결혼 8년 만에 득남이었으므로 엄마의 기쁨은 컸다.

 

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린 시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희미한 기억 속에서 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의 학창 시절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내성적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감수성이 예민해서 작은 일에도 눈물을 픽픽 쏟는 아이였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도 울고, 아버지가 밥상머리 교육을 해도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교실 앞에 있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 괜스레 엄마를 보고 있으면 짠한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 다녀올게요'라는 말을 선생님에게 못 했다. 그 말이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지에 똥을 자주 쌌다.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다. 스트레스받으면 과민해지는 대장도 문제였지만 탈장된 것도 모른 채 지냈던 것이 원인이었다. 지금 내 나이 마흔, 아버지는 내일모레 여든이다. 아버지는 그때 내가 탈장인 것도 모르고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며 미안하다고 하신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특별한 사건 사고가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했다. 공부도 중간, 운동도 중간.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 그리고 또래 친구들이 겪는 사춘기도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사춘기가 왔다. 4년제 지방 국립대를 2년 다녔다. 그런데 다시 수능이 보고 싶어졌다. 지방 국립대를 때려치우고 2년제 전문대를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학교가 다니기 싫었을까. 수능을 본다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출석 미달로 학사 경고, 유급까지 받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시기다.

 

대학시절의 나는 의지박약, 쓸데없는 걱정, 목적과 계획만 있고 행동은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 시기 아내를 만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나를 학교에 가도록 도왔다. 학교 땡땡이치면 전화해서 빨리 학교가라고 재촉했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정말 아내에게 감사한다.

 

학창 시절동안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다. 모나지 않은 성격이 한 몫했다. 친구관계는 원만했고 모두 나를 편하게 대했다. 

 

나의 군대 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도 중간이었다. 군대에서는 사실 중간이 편하다. 선두에 나서면 고생한다. 늦은 나이에 군대를 왔다. 선임들이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말년 병장이 나보다 어렸다. 덕분에 군생활은 편했다. 자존심 조금만 죽이면 형이라고 대접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함께 했던 군대 선임들과 잘 지낸다. 전역 후에도 형, 동생 하며 잘 지내고 있다.

 

군 생활, 학창 시절, 사회생활 등 어떤 시점을 돌아봐도 내 장점은 원만한 인간관계에 있는 듯하다. 사람들과 트러블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친밀한 사람들과 꾸준히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나의 사회생활

사회생활에서도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장과 좋은 관계를 맺어 연봉은 빠르게 올랐다. 회사를 옮기게 되었을 때도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회사에 추천해 주었다. 성실함과 책임감이 한 몫했다. 이것은 분명한 나의 장점이다.

 

 

하지만 나의 성실함과 책임감은 사회생활, 직장 생활을 할 때 발휘되는 듯하다. 만약 나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자기 주도적으로 시간을 활용하여 자기 계발을 하라고 하면 금세 나태해진다. 제약과 책임이 있어야 게으름에서 벗어나 움직인다. 대학시절에도 그랬고 육아휴직으로 잠시 쉴 때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할 일이 있고 목표한 바가 있는데도 온갖 핑계를 대며 미루기 일쑤다. 내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고쳐야 하는 단점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실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맡은 일에서 실수가 생기고 컴플레인이 접수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좋게 말하면 완벽주의 성향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걱정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면서 스트레스받고 일처리 속도를 늦추는 좋지 않은 성향이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 걱정과 고민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한다. 이런 성향도 내 성장을 막는 단점 중 하나이다.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핑계는 추진력을 떨어뜨리고 일 진행 속도를 늦춘다. 또한 일을 미루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

희미한 기억이지만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A4용지 한 장으로 축약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했던 행동들과 생각을 돌아보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내가 누구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친구, 동료와의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다.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졌다. 이것은 장점이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작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잘 받는 사람이다. 책임과 제한, 제약이 있어야 나태해지지 않는다. 제약이 없으면 한없이 게으르고 갖은 핑계로 일을 미루는 사람이다. 머릿속으로 계획만 세울 뿐 행동은 더딘 사람이다.

 

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번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미 답은 나왔다.

 

 

그만 생각하고 행동하자. 목표를 정했으면 의심하지 말고 시도하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죽을 얻든가, 밥을 얻든가 할 것 아닌가? 내가 원하는 성과는 밥이었다. 그런데 죽이 나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 죽 먹고 다시 시도해서 밥을 만들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제한, 제약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나에게 제한이 없을까? 아니다. 시간이라는 제한이 있다. 시간은 유한하다. 죽음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 당장 우리 가족 먹고살 것을 생각해야 하는 마당이다. 무한정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모아 놓은 돈이 사라지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다. 정신바짝 차리고 행동할 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지나가면 다시는 없을 시간이다. 지금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대학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겠다고 했던 각오와 다짐을 다시 생각하자. 한 번뿐인 인생에서 직장 생활만 하다가 죽기 싫다고 차버린 직장 아니던가? 사직서 던질 때 품었던 포부를 다시 되살려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무엇 하나에 미쳐서 살아보고 싶다. 철없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아내를 위해서 끊임없이 몰두하고 몰입할 것이다. 아빠를 응원해 주는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루고 싶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 목표를 이룬 아빠의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고 싶다.